체공녀 강주룡

작성일 :
201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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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저 | 한겨레출판 | 2018. 7. 18

이채민(본원 연구원)

 

채공녀 강주룡 책표지

‘삶이란,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투쟁하는 것’.. 이처럼 강주룡을 잘 나타내는 말이 있을까. 강주룡은 서슬 퍼렇던 일제 강점기 시절 최초 을밀대 고공투쟁을 한 항일노동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1901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난 강주룡은 14세 때 가난으로 가족을 따라 서간도로 이주했다. 1921년 20세의 나이로 5세 연하 남편 최전빈과 혼인, 24세 때 채찬(蔡燦)의 지도 아래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남편이 병사하자 ‘남편 죽인 년’이 되어 시집에서 쫓겨난다. 이후 가족들과 귀국하여 평원고무공장의 여공으로 가장 역할을 했다.

당시 조선의 고무공업계는 1929년 세계공황기를 맞아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1930년 5월 서울에서 전조선고무공업자대회를 열고 임금 인하를 결정한다.

이에 1930년 8월 초 평양고무공업조합이 종래 임금의 17% 삭감을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 노동자들은 일제와 결탁한 자본가들을 비판하며 반대투쟁을 벌인다. 1931년 5월 16일 평원고무공장 여공들의 단식 파업은 이처럼 평양 2,300명 고무직공들의 임금 삭감에 대한 항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일제는 만주 침략을 위한 군국체제로 치닫게 되면서 조선을 향한 탄압과 수탈을 날이 갈수록 더욱 강화된 때였다. 그리고 여공들 투쟁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여공들은 자신들의 투쟁을 사회에 알리고 여론을 환기시킬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한국 최초 노동자 고공투쟁이라는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강주룡은 1931년 5월 평원고무공장 파업 중 일제 경찰에 의해 공장에서 쫓겨나자 을밀대 지붕으로 올라가 무산자의 단결과 노동생활의 참상을 호소하였다. 광목을 찢어 줄을 만들고 감아 올려 줄타기하듯 올라간 지상 12m 을밀대 지붕 위에 앉아 ‘여성 해방, 노동 해방’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8시간의 투쟁끝에 주모자로 체포된 강주룡은 고공투쟁의 상징이자 여장부로 여론의 주목을 받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출소 두 달 만인 1931년 8월 13일, 평양 빈민굴에서 30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동안 우리는 역사 속 주인공은 주로 남성으로 여성은 투쟁하고 고뇌하는 (남성) 옆에서 눈물과 함께 안타까워하며 인내하는 서사에 매우 익숙했다. 그러나 ‘채공녀 강주룡’은 이런 익숙함을 거부한다. 직접 싸우고 고뇌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여성, 그가 바로 강주룡이다. 그것이 조선 최초 고공 농성자라는 강주룡이 가진 역사적 가치보다 내게 더 의미있게 다가온 이유이다.

참고 사이트

국가보훈처 나라사랑광장 독립유공자 정보검색  (www.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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